일반여행

20180907 강릉 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gotemple 2018. 9. 7. 21:00

오죽헌에 갔다.

한 15년 전쯤 아이들과 함께 갔었는데 그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죽헌의 중심인 몽룡실은 그대로이지만 주변 전시관이나 정원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원래 강릉에는 오래된 가옥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선교장을 포함해 규모가 큰 가옥들이 많이 있다.

고가가 많은 이유는 한국전쟁 때 피해를 덜 입었고 전쟁 후 산업화 시대에 큰 수혜를 받지 못해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에 비해 현대적 도시 발달이 늦은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죽헌도 원래 가옥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아마 한국 전쟁 후 살아남은 건물은 몽룡실과 사랑채 정도일 것이다.

유명인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이 집은 다른 고가들에 비해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어느 덧 공원 수준의 정원과 시립박물관까지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가 되었다.


오죽헌의 정원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내가 아주 어릴 때에도 오죽헌에 왔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대나무와 예쁜 나무들 뿐이다. 우리나라가 전국적으로 정원에 신경쓰기 이전부터 오죽헌은 정원에 신경을 쓴 것 같다.

선교장도 마찬가지지만 오죽헌을 거닌다는 것은 예쁜 정원을 걷는다는 것이다.


한동안 이황과 이이에 심취해 있었다. 조선 후기 300년을 지탱할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던 철학자들.

같은 조선이지만 임진왜란이전과 이후의 조선은 성격이 다른 나라이다. 임진왜란이란 외형적 큰 사건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살펴보면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 완성이란 이데올로기적 측면도 강하다. 전쟁과 성리학 완성이 후기 조선의 성격을 결정한 것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성리학은 너무 단단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변화가 뚫고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20세기 초 국제사회의 멸종된 공룡이 되어 버렸다.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은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지만 변하지 않았기에 멸종된 공룡이 되었다.

개인적 수양을 위한 철학은 내면적으로 파고 들어가도 괜찮다. 본인은 성인이되고 군자가 될 것이다. 물론 주위 집안 사람들은 고생을 할 거다.

그러나 국가 통치 철학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내면적으로만 향하면 나라가 망한다. 조선이 그랬고 티벳이 그랬다.


사임당은 그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다. 아마도 조선시대 동안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 제도 속에 매몰 시키고 살았을 것이다.

그 많은 잊혀진 여인들 중에 사임당이 기억되는 이유는 '잘난' 아들 덕분......

자신보다 못한 남편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자식 교육에 올인했다. 그녀의 뛰어난 관찰력과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손재주를 가지고 현대에 태어났으면 화가가 아니더라도 이공 계통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죽헌 설명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6a1279a

강릉시립박물관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1106























멀리서 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어 가까이 가 보았더니 드라마 기념탑이다.

현대에는 TV에 나온 것도 역사가 된다.






오죽헌의 중심인 대성사와 몽룡실에 이르는 진입로는 매우 넓다.

나무 심은 정원도 넓고  보도블럭이 깔린 광장도 매우 넓다.

거의 궁궐에 들어 가는 느낌.

과연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기대감이 한껏 높아지고  그 우월감내지 권력도 느껴진다.

그러다가 몽룡실을 보면' 애개개'하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오죽헌을 정화할 때 정말 그 크기를 넓게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현판의 글씨가 왼쪽부터 시작한다.

보통 한자로 쓸 때는 오른쪽부터 시작하고 한글로 시작할 때는 왼쪽에서 시작된다.




오죽


몽룡실















오래된 사찰이나 서원, 고가의 의미를 더해주는 고목들.

건물은 다시 짓기도 하지만 나무는 그터의  세월을 증명한다.


몽룡실 뒷편, 마루에는 판문을 달고 온돌방 뒤에는 마루를 달았다.


사랑채와 안채로 가는 문



사랑채


닳은 나무들이 세월을 증명한다.



안채, 새로 복구한 건물이다.



















반들반들 닳은 나무



어제각 가는 문


어제각




정조가 하사한 벼루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무엇이가를 하사하면 건물을 만들어 보관, 전시했다.









율곡 기념관








이 전시실에 있는 대부분의 회화는 복제품이다.






요즘 박물관을 다니다보면 디지탈 아트 전시기법이 대세이다.


그림들이 움직인다.




이이는 본인의 명성에 비해 후대의 평가는 이황에게 밀린다.

그 이유가 아마도 자손이 번창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이는 서자 한 명만 생물학적 후손으로 남겼고 친척 들 중에서 한명을 입양하여 적자로 삼았지만 번창하지 못한 모양이다.

따라서 그의 많은 유품들이 당대의 이황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전시관의 유품은 이이의 동생인 이우의 자손들이 기증한 것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향토속관은 들어가지 못했다.


시립박물관


수중 보물전을 하고 있었는데 작지만 재미난 전시였다.

우리나라 수중보물을 한 눈에 볼수 있는 전시였다.

배모형도 귀여웠다. 초등생들이 보면 좋아할 것 같다.







































































































































멀리서 보기에 너와집이 있어서 휴게 공간인줄 알고 갔더니 고분 전시관이었다.






















자세히 보면 사임당의 수박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