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동창 중에 대학 졸업 후 바로 유학 가서 미국에 눌러 앉은 친구가 있다. 미국인과 결혼해서 한 5년에 한번씩 우리나라를 방문하는데 그녀가 올 때면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모든 계획 취소하고 그녀의 스케줄에 따라 모임을 갖곤 한다.
이번에는 지난 일요일에 가족과 만나서 창경궁을 보기로 했는데 비가 심하게 온다는 예보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경했다가 당일 만나기 2시간 전에 비가 좀 개이니까 다시 창덕궁으로 변경을 했다. 기어코 본인 아이에게 우리나라의 고궁을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니 다른 친구들도 아무 말 없이 따라 주었다. (아마도 늘 우리나라에 있는 친구가 이랬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으리라.)
안내를 따라 관람을 하여야 하는 창덕궁이라 관람시간에 맞추어 들어갔는데 우리가 관람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즘의 내 생활 패턴으로는 이 상황이면 관람 접고 근처의 찻집에 들어 가 수다 떠는 모드로 들어갔을 터인데 멀리서 온 친구 가족 때문에 꾹 참고 다른 관람객들이 관람을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한 30명쯤 되는 관람객들 중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들 마음먹고 왔는지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비원까지 다 돌았다. 심지어 우산도 없이 그 폭우를 다 맞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폭우 속의 고궁 산책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기와지붕 처마 끝으로 폭포처럼 떨어지는 빗물이 보여주는 장면도 꽤나 장관이었다. 오랫동안 아파트에 살아왔기에 잊고 있었던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물’을 손을 내밀어 만져 보는 재미도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열광하였다. 우산도 없이 폭우를 맞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지경이었다.
뿌연 물안개 속에 보이는 고궁 지붕의 날렵한 선과 폭풍 치는 바람 속에 흔들리는 비원의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날씨에 밖에 나와 있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둘러 본 낙선재에서 다른 관람객들과 살짝 떨어져서 늦게 남아 한옥에서의 휴식을 만끽하였다. 이야기 끝에 미국에서 온 친구가 대학교 때 같이 갔던 여행이야기를 하였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 때도 폭우 속에서 강원도의 소금강에 올라갔었다. 정말로 무모하고 겁 없던 시절이었다. 그 때 우리들 중 미국에 간 친구가 가장 겁이 없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겁이 없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다. 이 나이에 아직도 자신의 삶을 실험하고 도전하고 있었다. 한국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아이들의 성적에 울고 웃는 소심한 아줌마로 변해가고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와 소금강에 간 것이 1985년 여름방학이었다. 그해 여름 방학에는 거의 집에 없었다. 설악산, 소금강, 지리산(모두 정상까지 올라갔다.)으로 여기 돌아 다녔다. 심지어 내가 여행 간 사이에 집이 이사를 해서 여행 다녀 온 후에 새집을 찾아 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30대에 얻은 육체적 동통 때문에 관광버스타고 지리산 구경하는 것조차 고마워 할 지경이 되었다. 허리가 더 아프면 이것도 힘들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몇 년 있으면 다시 산을 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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