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외 사찰

20141025 2. 성주사지

gotemple 2014. 10. 26. 10:58

사적 제307호.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다음백과)

 

성주사는 통일 신라시대 말 구산선문 중의 하나였다.

이제는 넓은 대지 위에 석조물만이 남아 있다.

지세로 보아 매우 넓은 사찰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아 있는 탑들과 금강대좌의 위치가 특이해서 건축물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특이하게도 탑 3개가 나란히 서 있다. 

 

 

 

 

 

 

 

 

 

 

 

 

 

 

 

 

 

 

 

 

 

 

 

 

 

 

 

 

 

 

 

 

무슨 연유인지 옥개석 끝에 구멍이 나 있다.

 

 

 

 

중앙3층탑은 해체 보수 중이다.

 

 

 

 

 

 

 

 

 

 

 

 

 금강대좌 주위 네 구퉁이에 기초석이 있는 걸로 보아 저각이 있었나보다.

 

 

 

 

공사 중

 

 

 

 

 

 

 

 

 

 

 

 

아마도 돌 문지방 인 것 같다.

예전에 불국사 관음전에서 이런 형태의 석조물을 본적이 있다.

아마도 해탈문이 있던 자리가 아닐까?

 

 

불국사 관음전

 

 

 

 

 

 

 

 

 

 

낭혜화상탑비의 문장은 최치원이 썼다 최치원 사산비명 중의 하나이다.

사산비명 :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등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이 그것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1s0341a

나는 사산비명을 이제 다 보았는데 숭복사비는 비석받침만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았다. 비는 보지 못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